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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um Posts
남플교회
Apr 08, 2022
In 목회 컬럼
여러분 <행복회로>라는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이는 불행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극복하려고 행복한 상상을 하게 하는 뇌신경회로라는 신조어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회로를 돌린다는 말은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긍정의 최면을 걸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행복회로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 최면에서 풀려나는 순간 밀려오는 허무감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암담한 현실에 직면할 때 그 현실을 이길 수 있는 영적 수단이 있는데, 기도입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22:42). 그러나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올린 기도 끝에 하나님의 뜻이 고난의 잔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잔을 마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기도를 맺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참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22:43).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살려는 예수님의 결단을 보시고 천사를 보내어 돕고 계신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능력을 힘입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자기부인'입니다. 신자의 자기부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이는 그것이 신자의 삶에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을 마련해 드리는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고 계셨습니다. 그때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를 팔기로 거래를 마친 후에 그들이 붙여준 하속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양, 천연덕스럽게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라, 누가 예수인지 알려주려고 한 신호였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그 사실을 알고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으로 유다에게 물었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22:48). 유다는 이 질문을 예수께서 자신을 돌아서게 하려고 주신 마지막 기회로 삼아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단의 지배를 받고 주님의 은혜 밖에 있었기에 끝까지 돌아서지 않고 주님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드나요? '사람의 일'이 생각을 지배하면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성지에 가면 광야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 있습니다. 가시떨기입니다. 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는 그 곳에 가시떨기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이 식물의 가시는 원래 넓은 잎사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랜 가뭄과 태양 볕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가시로 변화 된 것입니다. 원래 넓은 잎사귀로 그늘을 드리워 주었을 것들이 물이 마르는 환경에서 가시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령에 은혜의 강이 흐르면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쉼을 주는 그늘처럼 풍성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메말라 삭막하게 되면 그의 말과 행동은 가시처럼 섬뜩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메마르게 되는 것은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재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입 맞추는 유다의 가증스런 행동이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능력이 있었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능력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난의 잔을 앞에 두고 진지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뜻에 철저히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니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었고 원수까지도 용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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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플교회
Apr 01, 2022
In 목회 컬럼
지난 22일, CNN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고전하는 원인을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그 보도에 의하면 러시아군에는 현재 총괄 지휘관이 사실상 없는 것 같다는 주장이었는데, 그 이유로 러시아군의 공격이 전반적으로 서투르고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총사령관은 공격과 후퇴의 시기를 결정하고 군사 물자 보급과 병력투입 등을 총괄해야 하는데, 러시아군의 전투 양상을 보면 이 체계가 와해되어 군대가 전의를 상실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이걸 보면서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 공동체의 명운이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에 나선 십자가 군사로 최고 사령관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고 사령관,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차원이 다른 삶을 살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번지에서 우리의 삶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바울은 십자가 병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써 세상 일로 절망치 않고 사명을 따라 산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복음 전도의 삶을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삶고 산다는 뜻인데, 십자가 병사는 어떤 상황에서든 주의 '말씀대로' 살고 주께서 맡기신 ‘사명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이런 감동적인 선포를 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 이 얼마나 담대하며 아름다운 선언입니까?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사흘간 앞을 보지 못하는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 이후 그의 삶에 대전환이 찾아와 복음전도를 위해 생명까지 내놓는 십자가 군사로 변했습니다. 다메섹 경험은 그로 하여금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 지 분명하게 깨닫게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잘 산 사람입니까? 말씀대로 사명대로 살았기에 누구에게든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잘 산 사람입니다. 연합감리교회 총회가 2024년으로 연기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교단내의 진보그룹이 득세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들은 2024 총회에서 교리와 장정 상의 '결혼의 정의'를 '두 성인의 결합'으로 바꾸려 합니다. 그러면 2024년 이후 우리 교단에서 동성애자 목사 안수와 동성애자 결혼금지 조항이 삭제될 것입니다. 2019년 특별총회의 결과, 현재 UMC 교단 법은 동성애자 안수와 결혼을 금지하고 있으나, 사회가 세속화 되고 반 기독교적 사상이 범람하면서 하나님 법도 교단법도 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은 암담하고 답답하나, 신29:29 말씀에 따라,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29). 하나님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당신이 감추어두신 뜻이 무엇인지 찾기를 바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네 인생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냐?' 고 물으시면 뭐라 답하겠습니까? 교단 멤버쉽입니까? 건물 수호입니까? 진리의 말씀과 신앙을 지키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하고 그 분을 증거하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감추어두신 일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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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플교회
Mar 25, 2022
In 목회 컬럼
KBS 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Homo Academicus(공부하는 인간)"이란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 전체 내용 중에서 이스라엘 교육방식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탈무드로 시작하는 이스라엘 교육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마따호쉐프'라고 합니다. 이는 “네 생각은 무엇이냐?”라는 의미로, 상대의 생각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이렇듯 어려서부터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법을 배웁니다. 즉 질문을 통해 서로 생각을 나누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자신 생각을 발전시켜가는 것입니다. 한 예로 한국 엄마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선생님 말씀 잘 들었냐?'라고 묻는데 유대 엄마들은 ‘오늘 선생님께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 답니다. 이들의 이런 교육방식은 ‘예시바’라고 불리우는 그들의 도서관을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서관하면 무엇보다 ‘정숙’을 떠올리지만, ‘예시바’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예시바는 탈무드를 학생들이 마주 앉아 질문과 토론을 하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책 내용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곳입니다. 이런 유대인의 교육방식에 대해 알고 나니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이 이해되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8:29).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막8:28).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듣고 바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따호쉐프’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너의 생각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알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했고, 예수님은 매우 흡족하셨습니다. 이는 그 고백을 들은 후 예수께서 당신에게 일어날 일을 계시한 다음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8:31). 그러나 이 말은 베드로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하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막8:32). 이 일은 2천 년 전, 제자들이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던 시대에 일어난 초유의 사건입니다. 제자가 스승의 말을 끊는 것만 해도 무례하고 지탄받을 일 아닙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스승을 책망까지 한 것이니, 상상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며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대속의 죽음으로 나가는 <승리>하는 길을 말씀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사단의 지배를 받아 세상에서 출세하는 <성공>하는 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이라고 다 생각이 아니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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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플교회
Mar 2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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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플교회
Mar 18, 2022
In 목회 컬럼
지난 3월 10일, 윤석렬 후보가 고국의 제20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날이 결혼 10주년이었다는데, 암튼 이 분은 스토리가 많습니다. 9번 도전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도 그렇고, 늦은 나이에 결혼한 그가 10년 만에 대통령이 된 것도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자 항간에 떠도는 말이 있습니다. “윤석렬이 부인을 잘 만나서 대통령이 된 것인가, 부인이 남편을 잘 만나서 영부인이 된 것인가?” 이와 관련된 오래전 조크 하나를 소개합니다. 클린턴 대통령 내외가 힐러리의 고향 마을을 방문했을 때, 한 주유소를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힐러리와 절친한 사이였던 남자 친구가 운영하는 주유소였습니다. 힐러리와 남자 친구가 반갑게 해후하는 모습을 본 클린턴이 돌아오는 길에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 사람 잘 만나서 오늘의 영광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해! 만약 저 사람을 만났으면 기껏해야 주유소 사장 마누라 밖에 더 되었겠어!그러자 힐러리가 지지 않고 응수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만약 저 사람이 내 남편이 되었다면 오늘 미국 대통령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저 사람이 되었을 거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 그런데 빌립의 말을 듣던 나다나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영 시큰둥했지요. 그래서 반문한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그러나 빌립도 포기하고 나다나엘에게 말했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1:46). 빌립은 자신이 메시야로 확신한 예수님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를 주로 믿게 된 과정을 생각하니, 그게 말로 설명해서 될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러지 말고 와 보라”고 강력하게 청한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의 초청을 받고 그렇게 빈정댔던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빌립이 강요하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삶에서 이전과 다른 어떤 변화를 보았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과거 모습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빌립의 모습이 전혀 새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외적 모습은 그대로지만 내적으로 풍기는 태도에서 큰 변화의 기운이 확실히 느껴진 것입니다. 이렇게 빌립의 변화된 모습이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예수님과 몇 마디 나눈 후, 놀랍게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위대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바리새인 등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고, 로마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고백이었으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강력한 힘에 이끌려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구원에 이르는 이런 믿음을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가 여기에 이르는 데에는 빌립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변화에서 힘이 느껴지는 진정성을 보았고, 그 힘에 이끌려 주께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영적으로 등대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입니다. 오래 전, 펜실베니아에서 경비행기가 한 대가 야산 중턱을 비행하던 중 추락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교단에서 운영하던 수양관에 세워진 철탑 십자가에 부딪혀 추락한 것입니다. 평소 경비행기 조종사들에게 등대역할 해 주던 십자가가 화를 초래한 것입니다. 불이 켜진 십자가는 길을 지시하며 생명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지만, 불 꺼진 십자가는 길을 가로 막아 귀한 생명을 앗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불현듯 찾아들 때를 대비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심령에 예수 생명의 빛을 환히 밝히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해 편견 있는 이들에게 그 분의 아름다운 실체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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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플교회
Mar 11, 2022
In 목회 컬럼
누구나 살면서 여러 형태의 고난이 겪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임하는 고난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 자체로 <선이나 악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6,8).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며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로 관영한 세상에서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인 고난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숙명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가 겪는 고난의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이 담아두신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기회로 삼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얼마 전에 소천한 이어령 교수가 그의 글에서 자주 인용했던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이란 라는 라틴어 격언은 의미가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언제가 죽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뜻이고 '카르페 디엠'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한편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은 인생을 회의적으로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게 살라는 뜻이요,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육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이 두 격언에는 매일 주어지는 삶과 언젠가 맞이할 게 될 죽음을 대하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부끄러운 고난을 당해도 억울하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누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면서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라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과 '아름다운 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아신다'는 생각을 하라는 뜻입니다. 또 '아름답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상태를 의미하는데,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그대로 되니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4). 이처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그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원을 하는 이들은 갓 모종한 화초 주위로 큰 화분을 빙 둘러서 그늘지게 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그 화초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주위를 어둡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고난이란 ‘어둠’을 허락하심은 우리의 믿음이 주께 뿌리내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주님을 닮아가며 믿음이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기만 아는 부당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억울하다고 자기감정대로 하며 고난에 저항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난을 통해 택한 사람들이 당신을 더욱 더 의지하게 만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황태와 같다!' 한 겨울 밤의 칼바람과 정오의 볕을 받는 중에 맛이 깊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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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플교회
Mar 04, 2022
In 목회 컬럼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맛에 사는 이들이 있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보이려고 사는 사람은 늘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뭔가 보여줄 것을 찾아 헤매며 피곤하게 삽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인 사람들은 진정 평안한 삶과 행복한 삶은 누리지 못합니다. 삶의 보상만을 바라보며 죽기 살기로 살다보니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주께서 주신 일상의 복을 인식하고 감사하며 삽니다. 그들은 세상 일로 지나치게 근심/염려하지 않으며. 세상의 지위,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신령한 일을 감당하며 삽니다. 요즘은 초등학교에서도 아이들끼리 욕을 많이 한다는데, 한 엄마가 묻자“욕이 파워야!”하더랍니다. 욕 잘하는 아이가 힘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눌리지 않으려고 욕을 해댄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끄러움이나 죄의식도 없이 단지 파워 있게 보이기 위해 욕을 해대듯이, 세상 사람들은 깊은 생각 없이 세상의 파워만을 얻기 위해 사는 듯합니다. 사람이 중생하지 못하면 누구나 이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예수님은 거듭난 사람을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 했고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사람>이란 말은 <삶>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삶이란 <살다>와 <알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살면서 알아 가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말 알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천국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은 한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당신께 나온 니고데모가 이 세계를 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표적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그의 관심이 하늘나라로 바뀌어지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역팀의 한 권사님이 “나는 하나님께 가져가지 못하는 것에는 투자 안 해”라고 하셨답니다. 단톡에 올라온 이 감동적인 말씀을 듣고 언젠가 읽었던 한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보낼 수는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39,40). 니고데모도 이 말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성령으로 거듭난 신바람 난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람 소리는 들어도 방향을 알 수 없듯, 성령으로 난 니고데모도 그리했던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43:19).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께 나오는 사람을 위해 지금도 생각지 못한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바람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절망이나 실패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바람이 나서 일하면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바람 난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데, 바람을 일으킨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애벌레는 길에 늘어선 것들이 다 문제 거리가 되지만, 나비에게는 그 모든 것이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순간 이전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령의 바람, 신바람을 맞아 이렇듯 존재론적으로 변화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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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플교회
Feb 25, 2022
In 목회 컬럼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을 할 때 보면, ‘눈물 젖은 빵’을 “초년고생 사서도 한다”는 우리 말의 그 ‘초년고생’ 정도로 알고 말하는 듯 한데, 사실은 원래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그의 저서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데, 괴테의 작품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노인이 읊은 시가 있습니다.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 본 일이 없고 단 한번이라도 외로운 밤을 눈물로 지새운 적이 없는 사람아 그대는 정녕 천상의 높은 힘을 알지 못한다... 정녕 모든 죄는 그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여기서 괴테가 ‘눈물 빵’을 논했을 때, 그는 인생이 아니라 신학을 논한 것입니다. 즉, ‘눈물 젖은 빵’은 일상적 생활고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한 고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괴테는 인간이란 존재는 고뇌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면서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41:1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며 육적인 쾌락을 도모한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벌레 취급을 받으며 모진 고통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 통곡이 기도로 변할 때 그들을 도울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하나님은 눈물에 젖은 빵을 먹으며 고난 받는 그 백성에게 말씀하심으로써 돕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는 방법으로 가장 큰 은혜롭고 힘이 되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고 살피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버러지 같은 야곱”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야곱처럼 비열하다는 뜻이요, 사기꾼인 야곱 같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부르신 것이 은혜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이 야곱인 줄을 아시면서도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2월 9일, CNN에서 한 독거노인의 기사를 보도했는데, 이런 삶의 단면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베레타라는 칠순의 한노인이 식탁 의자에 앉아 숨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기막힌 사실은 그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나 미라가 된 상태였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이탈리아 일간지 메사게로의 논평이 우리의 양심을 찌릅니다. “진정한 슬픔은 그의 죽음을 알아채지 못한 게 아니라 그가 거기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것이다.” 2년간 누구도 그 노인의 죽음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할 말을 잊게 합니다. 이는 그가 이웃과 어떤 관계였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요, 노인에 대한 그 사회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각각의 바벨론 강가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흘려듣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서 울 때 우리를 벌레 보듯 외면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거기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붙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강가에서 슬퍼하는 그 백성이 버러지 같이 비참한 상태에 있었지만 부르셨습니다. 비록 실패한 자리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버러지 같은 야곱아”라는 말은 경멸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표현인 것입니다. 즉, 벌레 같이 볼품없고 혐오스러워보여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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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플교회
Jan 21, 2022
In 목회 컬럼
우리가 사는 마이애미 지역에는 수많은 비치가 있는데, 다 나름대로 아름답습니다. 어디가 가장 좋고 그 다음은 또 어디이고 하는 식의 순위 매김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휴양지로 개발된 비치는 그 나름대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비치는 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알아주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모든 삶은 그 자체로 귀합니다. 신자라면 그 각각의 인생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외적 모습이 아니라 그 내면을 보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1:25). 세상에는 여러 가지 직책이 있는데, 신자에게 가장 존귀한 직책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직분입니다. 사람에 의해 임명되는 세상 직책과 달리, 이 직분은 주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을 그렇게 인식했고 그 목적이 말씀을 이루는 것으로 바로 알았습니다. 흔히 성직자만 주께서 임명하는 것으로 알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주께서 세운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께서 주시는 직분에 부여된 사명을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직분자는 성도를 온전케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려면 스스로 온전해야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면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려면 스스로 맡은 역할을 충실히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합해 직분의 목적을 말하자면 한 마디로 ‘섬기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자 키엘 케고르는 당시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런데 교회는 더 엄청난 일을 했다. 포도주를 물로 바꾼 것이다.” 그는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를 냉소적으로 비난한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자아가 죽을 때 가능한 ‘섬김’에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이처럼 구원받은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곧 각자 주어진 섬김의 십자가를 감당해야합니다. 간혹 '자기가 맡은 사역이 크네 작으네'하며 불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사역을 '직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직분자들이 사역을 행할 때 그 일의 크기를 세상 직위로 생각하여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영생이란 가장 큰 선물을 받았으므로, 이제 이 세상에 더 사는 것을 덤으로 여기고 주님처럼 섬김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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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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