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을 할 때 보면, ‘눈물 젖은 빵’을 “초년고생 사서도 한다”는 우리 말의 그 ‘초년고생’ 정도로 알고 말하는 듯 한데, 사실은 원래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그의 저서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데, 괴테의 작품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노인이 읊은 시가 있습니다.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 본 일이 없고 단 한번이라도 외로운 밤을 눈물로 지새운 적이 없는 사람아 그대는 정녕 천상의 높은 힘을 알지 못한다... 정녕 모든 죄는 그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여기서 괴테가 ‘눈물 빵’을 논했을 때, 그는 인생이 아니라 신학을 논한 것입니다. 즉, ‘눈물 젖은 빵’은 일상적 생활고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한 고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괴테는 인간이란 존재는 고뇌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면서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41:1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며 육적인 쾌락을 도모한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벌레 취급을 받으며 모진 고통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 통곡이 기도로 변할 때 그들을 도울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하나님은 눈물에 젖은 빵을 먹으며 고난 받는 그 백성에게 말씀하심으로써 돕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는 방법으로 가장 큰 은혜롭고 힘이 되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고 살피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버러지 같은 야곱”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야곱처럼 비열하다는 뜻이요, 사기꾼인 야곱 같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부르신 것이 은혜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이 야곱인 줄을 아시면서도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2월 9일, CNN에서 한 독거노인의 기사를 보도했는데, 이런 삶의 단면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베레타라는 칠순의 한노인이 식탁 의자에 앉아 숨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기막힌 사실은 그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나 미라가 된 상태였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이탈리아 일간지 메사게로의 논평이 우리의 양심을 찌릅니다. “진정한 슬픔은 그의 죽음을 알아채지 못한 게 아니라 그가 거기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것이다.” 2년간 누구도 그 노인의 죽음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할 말을 잊게 합니다. 이는 그가 이웃과 어떤 관계였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요, 노인에 대한 그 사회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각각의 바벨론 강가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흘려듣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서 울 때 우리를 벌레 보듯 외면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거기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붙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강가에서 슬퍼하는 그 백성이 버러지 같이 비참한 상태에 있었지만 부르셨습니다. 비록 실패한 자리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버러지 같은 야곱아”라는 말은 경멸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표현인 것입니다. 즉, 벌레 같이 볼품없고 혐오스러워보여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자녀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