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철학자인 세네카는 “표류와 항해는 다르다”며 그 차이를 인생을 생존하다는 것과 산다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듯 인생을 표류하듯 살고 있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은 결코 인생을 표류하듯 살지 않습니다. 말씀 위에 서서 뚜렷한 인생의 목적 하에 정한 방향으로 항해하며 삽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삼하6:1,2). 다윗은 통일 왕국을 이룬 후, 하나님의 법괘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시기를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그는 법괘를 가까이 하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방향으로 이끌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만이나 되는 인원을 동원했고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법괘를 옮길 때는, 웃사로 수레에 실어 옮기도록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 답을 역대상 13장 1절 말씀에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대상13:1). 다윗은 법궤를 옮겨오는 이 중요한 역사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사람들’하고만 논의했을 뿐, 하나님과 의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법괘 운반을 아비나답의 아들에게 맡기고 수레로 옮기게 한 것인데, 아마도 법괘 운반 행사에 참가하는 군중을 의식하여 법괘 운반을 하나의 멋진 이벤트로 만들려는 인간적인 마음이 앞섰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법괘를 운반하다 죽은 웃사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도 무시했던 다윗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웃사가 율법을 알고도 하나님이 아닌 왕의 명령을 따른 자기 탓을 해야 할 것입니다.
법괘를 수십년간 모셨으나 법괘 운반을 법대로 하지 않아 화를 당한 웃사와 달리 오벳에돔은 단지 법괘를 3개월 간 잘 모심으로 인해 복을 받은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삼하6:12). 한편 역대상 28장을 보면 고라 출신 문지기 명단을 1-7까지 연대순으로 소개한 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대상26:8). 오늘 날 세상의 문지기라하면 그리 존경을 받거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전의 문지기는 매우 중요한 직임이었습니다. 한 예로 오벧에돔은 예루살렘 동서남북 4대문 중 남쪽 문지기로 임명되었고 아들들은 곳간 문지기에 임명됐는데, 이 곳간은 제사에 쓰이는 거룩한 물건들을 보관해두는 장소입니다. 오벧에돔과 그 자손이 이 두 곳을 맡았다는 말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매우 중요한 직을 맡았다는 의미입니다.
웃사와 오벧에돔의 이야기는 신앙생활의 연수를 자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주어진 기간 동안 얼마나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믿음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역사하고 있는 지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 안에 서 있지 못하면, 말씀이 정말 필요한 순간에 말씀을 붙들지 못합니다.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사람이 무의식 중에라도 말씀을 붙들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들이 인생 대해를 표류하지 않고 믿음의 노를 저으며 소원의 항구로 항해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