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라는 것이 많은 경우에 다소 주관적이기에, 어떤 객관적 기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누가 믿음이 좋은 사람일까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생활 잘하면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이웃에게 전도하고, 선교하면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것들은 믿음을 말할 때 좋은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의 증거를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바울은 믿음 있는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신앙생활은 ‘행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사역을 힘써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화평을 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기서‘화평’은 ‘평화’와 같은 말입니다. 이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감정적 평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에 들어간 자에게 위로부터 임하는 영적 평안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 지역에 머물 때 쓴 서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기 앞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에서는 감금당했고 다른 도시에서도 대적의 핍박으로 쫒겨나 고린도까지 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즐거워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평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뿐만 아니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환난이 없을 때만 즐거워하는 것 아닙니다. 환난이 끝난 다음에나 즐거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환난과 고난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는 그들 안에 내주하는 성령이, 고난의 시험을 지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2)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인간을‘호머 에퍼런스(Homo Esperans)’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존재라는 뜻인데, 그래서 사람은 소망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바라며 소망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더 좋은 사람과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며, 더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이런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견디고 이깁니다. 대강절은 이 점에서 의미가 있는 절기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대강절을 기다리는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복은 인생사 모든 순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2:24). 한 마디로 세상 그 무엇보다 심령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솔로몬은 ‘심령의 낙’ 곧 ‘마음의 평안’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평안은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로, 욕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셔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때 임하는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