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집안 가구를 재배치하든지, 이사를 할 때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장롱/소파 같은 물건을 옮기면 그 밑에서 동전 몇 개씩은 나와서 줍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기분은 어떻나요? 날아갈 듯이 기뻤나요? 그건 아니지요. 잠깐 입가에 미소가 머물다 사라지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여자가 찾던 드라크마라면 어떨까요?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15:8,9). 이 비유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을 묵상하다가 그녀가 보인 이상한 행동에서 인간이해에 관한 교훈을 하나 얻었습니다. 여자는 그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등불을 켜고 온 집을 쓸며 쉬지 않고 찾았습니다. 한 마디로 난리법석을 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자는 왜 그랬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이 그 여인에게는 매우 특별한 의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어려서 딱지치기를 많이 했는데, 당시 딱지치기는 남자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놀이였습니다. 폐지로 만든 사각형의 딱지는 그 당시 어떤 보물보다 내게 소중했습니다. 그 중에 특히 ‘갑빠 딱지’로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딱지치기 할 때, 상대방의 딱지에게 쉽게 넘어가지 않는 딱지를 말합니다. 그 딱지만 있으면 무서운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 귀한 딱지가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내게 황당한 경험이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나는 즉시 집안 곳곳을 헤집고 찾아다녔습니다. 그때 어떤 심정을 가지고 찾았겠습니까?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마음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다가 그것들을 아궁이에서 발견했는데, 그 순간 화가 났지만 또 얼마나 기뻤던지 모릅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헬라 화폐로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데, 당시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이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이 드라크마가 화폐가 아닌 다른 용도로도 쓰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당시 신랑은 신부에게 정혼의 증표로 열 개의 드라크마를 주었는데, 신부들은 그것을 꿰어서 머리나 목을 꾸미는 장식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자가 열 드라크마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사랑의 증표를 잃어버린 것이며, 나머지 아홉 개의 드라크마도 못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물질적 가치로 볼 때는 대단치 않았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담긴 사연은 세상 무엇을 주고라고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에게 그 드라크마는 동전이 아니라, 결코 놓을 수없는 추억이요 사랑의 증표라는 사실을 안다면 여인이 실성한 듯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동전을 찾는 모습을 보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여인이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진정 은혜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결코 하나님의 사랑 받을 만한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 <그럴 수 있지!> <무슨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도 자기처럼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인정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인간의 관계가 깨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