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 전역에서 대학 풋볼 경기가 한창입니다. 스타디움마다 관중으로 가득 차, 팬데믹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경기를 보면서 스타 플레이어를 주목해 보고 그들의 멋진 움직임에 열광합니다. 그런데 경기의 성패는 그들 한 두 명의 개인기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풋볼 같은 단체 경기에서는 감독들의 전술과 전략이 경기의 성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감독들이 팀을 운영할 때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게임의 주도권을 잡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놓치면 경기 내내 상대 팀에 끌려 다니며 수구적인 입장을 취하기에 경기의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뛰는 영적 경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적 전쟁터인데, 이 전쟁에서도 주도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 믿음을 갖기 전에는 영적 전쟁이라는 말이 생소하기도 하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살려 하면 할수록 모든 일상이 영적 전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대적하라는 것은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갖추라는 의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것은 신앙생활의 성패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다면 그건 세상을 자기 힘으로만 살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 중에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믿음으로 살려하니 사는 게 재미가 없네요.” 정말 믿음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재미없나요? 기쁨의 가치를 바로 알면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쾌락’과 비교되지 않는 영적인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런 기쁨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마귀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한 순간 임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사는 자가 계속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 잠시 누리는 육적 기쁨이 아니라, 주와 동행하면서 누리는 영적 기쁨입니다. 인생길에서 수시로 직면하는 사단의 전방위적인 공격을 막아내려면, 바로 이 즐거움을 알고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극장에 소개되었던 국내 최초로 안나푸르나 산에 오른 남난희라는 유명한 여성 산악인이 있습니다. 산에 미쳐 살던 그녀에게 큰 변화가 찾아들었습니다. 아들을 낳은 후 얼마 못되어 남편이 갑자기 출가를 한 것입니다. 그 바람에 그녀는 생활과 양육의 책임을 모두 도맡아야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산에 오르지 못하게 된 그녀는 유기농 된장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녀의 된장은 입소문을 타고 잘 팔렸지만, 그는 그렇게 시간을 다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활이 가능한 정도만 일을 하고 대신 집 근처의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안나푸르나를 오르던 그녀에게 그 산은 비교가 되지 않는 낮은 산이었으나 그녀는 그 산을 오르면서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에 산에 올랐을 때는 정상에 오를 때까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어요. 오직 정상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산을 오르며 산과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남난희 씨도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에 올라야만 산에 올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바뀌어 산 중턱도 산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서 그 즐거움을 노래한 것입니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5:11). 시인처럼 주께 피하는 자는 그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살기에 삶의 정상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바닥에서도 기뻐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믿고 삶의 바닥에서도 주께 피하는 것입니다. 시인 다윗은 자신이 최고의 존재는 아니나 하나님께 유일한 존재일 수는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할 수 없는 고난 중에 주님께 피해 나간 것입니다. 다윗은 이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었기에 정상에 오르지 않고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단의 모든 역사를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