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고등학교 시절, <마이카 시대가 곧 도래한다>는 기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코 웃음 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왠만하면 누구나 자가용을 몰고 다닙니다. 미국 사는 우리들은 가족 수만큼 차를 소유한 가정이 적지 않습니다. 행복이 이런 외적 물질적 풍성함에 있다면 우리는 70, 80년대 보다 지금 훨씬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가 과연 물질이 풍성한 지금이 이전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많은 이들이 마음속에 갈증과 공허함을 채우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합니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시119:152). 여기서 시인이 <알았습니다>라고 한 말은 <배워서 알다>라는 의미로 주께서 가르쳐주시어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그 뜻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시인이 직면하고 있었던 내적 갈증과 공허함은 사라졌고 자신감과 존재감은 높아진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인간의 삶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Being & Having’ 즉, ‘존재와 소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대부분 ‘존재’보다 ‘소유’를 위해 삽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 나면 ‘존재’의 기쁨을 알기에 더 이상 ‘소유’만 추구하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시인이 회복을 이루게 된 것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숨길 수 없는 욕망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골로 다니는 식당이나 미용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단골집을 간다고 생각하시나요? 값이 싸고 맛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아는 곳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심리적 관점에서 보면 그 곳이 ‘나를 알아주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인간 안에는 자기를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이런 욕망이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성은 기회만 되면 독버섯처럼 솟아올라 인간의 삶을 지배합니다. 사단은 이런 인간의 자기과시욕에 불을 붙여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의 인정이나 자기과시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졸업 40주년을 기념해서 동창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친구가 자식 자랑을 하자 뒤질세라 자랑을 했습니다. 손자 자랑, 사업자랑, 주식해서 돈 번 자랑 심지어 개 자랑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친구들 자랑을 듣다가 자기도 자랑할 것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나인 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 그냥 내가 좋아 웃고 어떤 날은 산책하다가 내가 나인 것이 자랑스러워서 눈물지은 적도 있습니다.” 이 친구의 자랑의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높아진 자존감이었습니다. 그는 외부의 조건으로 인한 자랑이 아니라, 내면의 자기실존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나, 사회적 지위/명성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존재’로 삶을 증명합니다.